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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발렌타인

영화이야기|2016. 4. 12. 14:45



얼핏 기억하기에 『블러디 발렌타인』은 발렌타인 즈음해서 개봉 소식이 들렸습니다. 제목을 시기에 맞추겠다는 계산이었을 게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서도 적잖은 흥행 성공을 거두던 터라 그 여세를 몰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포영화는 역시 여름시즌! 이라는 오랜 전통 아래 7월 23일로 날짜가 연기됐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극장으로 들어와 공포영화로 한기를 느끼라는 의도였으나¸ 슬슬 장마가 온다니 이를 어쩌나? 그러나 걱정할 일 없습니다. 『블러디 발렌타인』은 장마를 뛰어넘을 3D 입체영화라는 복안을 갖고 있습니다. 3D로 공포영화 본 적 있나? 없음 말을 하지 말자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극찬한 1981년작 『피의 발렌타인』을 리메이크한 영화¸ TV 드라마의 젊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 무식하게 잔인한 고어 영화 등등 『블러디 발렌타인』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이것이 세계 최초의 Full 3D 호러영화라는 점입니다. 오프닝의 제작사 로고부터 영화 마지막의 엔딩 크레딧과 짧은 보너스 영상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3D 입체 영상으로 무장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도끼 같은 게 갑자기 객석으로 날아오는 수준이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50% 정도 답으로 인정해주겠습니다. 물론 입체 영상이라는 이름에 맞게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장면이 여럿 등장하긴 하지만¸ 그 외의 일반적인 장면까지 모두 3D 입체라는 점이 기존의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화만의 새로움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입체 영상을 경험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거다. 그야말로 핸드폰 액정으로 보나¸ PC 모니터로 보나¸ 스크린으로 보나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얘기 입니다. 지금까지 2D 영화들이 스크린에 영사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준에 그쳤다면¸ 3D 입체영화는『굳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모든 장면에서 3차원¸ 말 그대로 입체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영화 속의 모든 사물이 질감과 양감을 갖고 있으며 미장센은 공간감마저 지녔다. 단순히 포커스 인/아웃을 통해 거리감이 있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아니라 실제 거리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기존 영화들은 프레임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급급했지만 『블러디 발렌타인』은 관객을 직접 프레임 안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하여 이 영화를 3D로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감히 말하건데 영화의 반도 못 본거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말하고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블러디 발렌타인』이 3D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닙니다. 놀이동산에서 경험했던 10~15분 길이의 입체영상이 아닌¸ 영화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 역시 중요한 요소다. 영화는 광산주의 아들 톰『젠슨 애클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과거 톰은 실수로 다섯 명의 동료를 죽이고 해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1년 뒤 의식을 찾은 해리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어 22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들의 심장을 꺼내는 엽기 행각을 벌이고 사라집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광산을 처분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은 톰은 경찰이 된 친구 엑셀『커 스미스』과 그와 결혼한 옛 연인 사라『제이미 킹』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미치광이 해리도 다시 부활해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갑니다.


영화는 끔찍한 살해 장면이 볼거리인 전형적인 슬래셔 영화 입니다. 여기에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같은 젊은 감각을 섞어 익스트림 슬래셔라는 이름을 달았습니다. 빠르고 강렬한 화면 속에 청춘스타들을 등장시켜 감각적인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사실 내용에서 획기적일 것은 없습니다. 그저 슬래셔 영화들이 지닌 관습적인 특징을 드러낼 뿐입니다. 곡괭이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살인마는 이 무식하고 잔인한 살인 도구로 찍고 가르고 꽂고 으깨는 등 예상되는 모든 잔인한 사용법을 보여줍니다. 객석을 향해 날아오던 곡괭이가 머리에 박히고¸ 머리를 관통시킨 곡괭이를 천장에 꽂거나¸ 턱에 박힌 곡괭이를 앞으로 잡아당겨 치아와 턱뼈가 객석을 향해 우수수 떨어지게 합니다. 의도적으로 3D 입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앵글도 있지만¸ 공포영화 특유의 잔인한 장면이 입체 영상과 더해져 그 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아쉬운 점은 치밀하지 않은 전개 방식입니다. 초반부터 살인마를 등장시키는 전개 자체는 속도감이 있지만¸ 캐릭터의 설명이 불충분하고¸ 사건의 인과 관계도 타당성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공포영화 특유의 프레임을 통한 임팩트는 나쁘지 않지만¸ 시퀀스 전체를 아우르는 흥미진진함은 다소 부족합니다. 그나마 마지막에 누가 범인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장면은 흥미롭다. 사실 살인마가 광부 마스크를 쓰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등장했을 때부터 예상됐던 일이긴 하지만 그나마 영화가 프레임에 의존하지 않고 시퀀스의 긴장감을 주는 유일한 부분입니다. 살인마는 마스크 덕분에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속편에 대한 암시보다는 피의 발렌타인은 끝나지 않는다는 공포영화의 고전적인 엔딩입니다.


『블러디 발렌타인』은 공포영화로서의 평가 이전에 영화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으로 거론될 것입니다. 최초의 Full 3D 입체영화라는 점과 함께 그동안 애니메이션이나 SF¸ 어드벤처에 국한됐던 3D 입체영화 장르를 공포영화로까지 넓혔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 1950년대에 이미 『밀랍의 집』 『크리처스 프럼 더 블루라군』 『더 마스크』 등의 작품이 호러와 3D 입체영화의 결합을 시도한 적이 있긴 하지만¸ Full 3D로 제작한 것은 처음입니다. 입체영화의 효과를 잘 드러내기에 공포영화처럼 좋은 장르도 없습니다. 하지만 3D 입체상영 시설을 갖춘 극장이 국내에 많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곧 드림웍스와 픽사를 위시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이 3D로 제작되고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틴틴』 등이 3D로 개봉되는 시점에서 3D 입체영화 상영 환경의 부족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극장은 극장만이 줄 수 있는 영화 관람의 특별한 매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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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이야기|2016. 4. 1. 15:47



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옵니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합니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입니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합니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습니다. 『더 리더ː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입니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합니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습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합니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합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입니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합니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갑니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집니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립니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입니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닙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킵니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합니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닙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습니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합니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입니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집니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합니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습니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됩니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집니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습니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합니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입니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합니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됩니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됩니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됩니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합니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합니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줍니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됩니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됩니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합니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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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영화이야기|2016. 3. 27. 10:23



누굴 때리는 X새끼는 지가 안 맞을 줄 알거든. 근데 그 X새끼도 언젠가 X나게 맞는 날이 있어. 근데 그 날이 X같이도 오늘이고¸ 때리는 새끼가 X같은 새끼네. 여자를 구타하던 한 남자를 또 다른 남자가 흠씬 패줍니다. 여자에게 다가선 이 남자¸ 예상을 비웃듯 따귀를 때립니다. 왜 맞고 다니냐¸ XX년아. 『똥파리』의 상훈『양익준』은 그런 남자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똥파리마냥¸ 살면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형 말입니다. 상훈은 입에 걸레를 물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손찌검은 예사다. 운동권 학생들과 노점상¸ 철거민들을 깔아뭉개는 것이 본업입니다. 그래도 직업 정신은 투철합니다. 떼인 돈 받아내는 귀신입니다. 한 마디로 괴물입니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상훈의 속내를 들여다보자고 권유합니다. 사실 이런 괴물에게도 가슴 한 구석에 투박하나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 입니다. 『올드보이』의 대사를 빌려와보자. 아저씨¸ 내가요¸ 아무리 짐승만도 못 한 놈이라도요¸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상훈이 이렇게 망가뜨린 연원은 다름 아닌 가정 폭력입니다. 어머니와 동생을 동시에 죽음으로 내몰았던 아버지의 폭력은 상훈의 삶을 나락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버지가 15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지금도 그 사건은 씻을 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양익준 감독은 반복해서 광기에 젖어 좁아터진 부엌에서 칼을 휘둘러대는 아버지들의 얼굴을 흔들리는 카메라에 잡아냅니다. 상훈이 우연히 만나 교감을 나누게 되는 여고생 연희네 사정도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베트남 참전 용사이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아버지는 노점상을 하다 용역 깡패의 폭력에 목숨을 잃은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계속해서 폭력을 휘두르겠습니다.



이렇게 일상화된 폭력과 아버지¸ 그리고 핏줄은 『똥파리』를 가로지르는 핵심 주제 입니다. 욕지거리부터 구타를 일삼으며 사채 빛을 받아내는 일까지. 상훈은 이미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됐으며¸ 또한 스스로도 폭력을 일삼는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양익준 감독은 클로즈업과 꽉 짜인 앵글을 통해 우리에게 가감 없이¸ 아니 집요하게 그러한 폭력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강요합니다. 실상 이 폭력은 전부 아버지 세대에게 물려받은 유물들입니다. 이 나라 애비들은 다 X같아. 근데 자기 가족들한테는 꼭 김일성처럼 굴려 그래라는 상훈의 절규는 그래서 더 크고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가정의 일상화된 폭력이 결국은 한국사회의 폭력과 맞닿아 있지 않겠느냐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가 핏줄을 끊을 수 있으랴. 그렇기에 상훈이 가장 신경 쓰는 존재가 바로 조카 형인입니다. 배다른 누나와 그의 아들 형인¸ 이들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느껴갈 때 즈음¸ 과거의 기억을 소환시키는 아버지의 존재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상훈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를 흠씬 패 줄때¸ 이를 목격한 형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러운 피를 다 빼주고 싶다던 아버지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조카 형인. 그 아이에게만은 폭력의 고리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의지. 그러나 양익준 감독은 끝끝내 이러한 핏줄은 끊을 수 없다고 못 박습니다. 상훈의 더러운 피는 대신 아버지들의 폭력을 공유해 버린 연희의 동생 영재에게 대물림됩니다. 결국 상훈은 영재의 충동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양익준 감독은 희비를 교차해낸 에필로그를 통해 이러한 폭력의 순환 고리가 전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사실 『똥파리』의 이야기 구조는 꽤나 전형적입니다. 상훈은 우리가 느와르 영화에서 늘상 보아왔던 주인공 캐릭터의 궤적을 그려나갑니다. 잠시잠깐 안식을 맞이한 밑바닥 인생이 맞이하게 되는 예정된 혹은 예상치 못한 파국. 한국영화에 있어 가까이는 『비열한 거리』의 병두가¸ 약간 멀게는 『초록물고기』의 막동이가 보여준 비극성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짜 신인 양익준은 이러한 전형성을 정면으로 돌파해냅니다. 생생한 현실의 질감과 캐릭터들의 리얼함¸ 그리고 편집의 적절한 리듬감이 이 익숙한 이야기의 상투성을 훌쩍 뛰어넘어 버립니다. 더불어 특히나 연희와 나누는 교감 중요합니다. 구조적으로 비극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 동시에 상훈의 인간적인 면모를 한층 공감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자실을 기도한 아버지에게 피를 빼 준 상훈¸ 그리고 칼을 빼든 아버지를 물리치고 상훈을 만나기 위해 한강으로 달려온 연희. 끊어버릴 수 없는 핏줄을 인정한 상훈이 연희의 무릎을 베고 오열 할 때¸ 관객들은 분명 『똥파리』가 내보이는 진심에 가슴을 열어젖히게 될 것입니다. 


저예산 영화 『똥파리』는 투박합니다. 시종일관 욕지거릴 내뱉지만 그것이 유일한 표현 수단인 상훈이 마냥¸ 시종일관 은유나 상징과 같은 기교를 부리지 않습니다. 위악으로 가득 찼던 상훈이의 일상과 기억을 담담하게 따라 갈뿐입니다. 그리고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위무합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훈이 환하게 웃는 연희와의 술자리 장면이나 유일하게 상훈을 이해하는 친구 만식과의 쌍욕이 넘실대는 후반부 대화 장면은 무척이나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물론 공은 그런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라는 듯 카메라를 정직하게 들이댄 양익준 감독에게 돌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면 안에서 배우출신 감독이 이끌어낸 배우들 모두의 기교를 부리지 않은 진심어린 연기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분명 독립영화 『똥파리』는 50개관이란 상영관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우리 시대의 문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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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영화관

영화이야기|2016. 3. 15. 10:28



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하¸ 『영화관』』의 목표는 이처럼 자명합니다. 거장이라 명명된 35명의 감독들이 모인 것도¸ 그들이 3분으로 국한된 러닝타임의 과제를 받아들인 것도¸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영화관』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준 영화 그 자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자신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발췌하는 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존재케 하는 관객을 위한 헌사에 가깝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그들이란 단어의 의미는 영화를 만든 거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화를 보는 관객입니다. 영어 원제『To each his cinema』의 그들이 their가 아닌¸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his로 표기된 건 이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감독 자신이라면 제인 캠피온과 같은 여류 감독이 포함된 자신들을 결코 his로 묶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와 같이¸ 『영화관』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 즉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들의 자발적인 주객전도 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3분이라는 폐쇄적인 러닝타임을 통해 무려 32작품을 나열하는 『영화관』은 각각의 작품을 매만진 주인들의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로 채워졌습니다. 32구간의 여정은 프랑스 다큐멘터리의 거장 레이몽 드파르동의 『야외 상영관』에서 출발해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감독 켄 로치의 『해피 엔딩』에서 멈춘다. 3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보여지는 제 각각의 사연들은 무덤덤하게 현실을 응시하거나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상황으로 연출되며¸ 우연처럼 보이는 상황극을 그려내거나 감각적인 영상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일맥상통한 건 하나같이 스크린이 걸린 영화관-실내가 됐든¸ 실외가 됐든¸ 절대명사적 공간 의미가 아닌 영화를 트는 장소로서 명명되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극장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며 그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영화에 매혹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단적으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가 상영되는 극장의 텅 비었다시피 한 상영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영화에 몰입한 늙은 매표원과 그 뒤에서 격정적인 애무를 즐기는 연인이 등장하는 안드레이 콘잘로브스키의 『어둠 속의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영화는 애무를 즐기는 연인을 조롱하지도 혹은 늙은 매표원의 진지한 관람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다. 그들의 상영관은 각자에게 개별적인 의미가 있을 뿐¸ 그 자체로서 규정된 가치로 이해되지 않는 공간입니다. 감상의 다양성과 영화에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는 상영관에 다양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거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감독들은 각자의 양식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스크린에 담아냅니다. 그 안에는 심오한 의미적 해석도¸ 혹은 가치 부여에 대한 동기 유발도 하나같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수한 영화가 있을 뿐입니다. 영화를 기다리는 시골 아이들의 눈동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흘리는 감동의 눈물은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치이자 영화를 존재케 하는 이유 입니다. 『상영관』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혹은 영화란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한번쯤 되묻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영화란 지나친 예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자본의 수단으로 몰락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를 통해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합니다. 지나치게 경도된 취향을 계급주의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포식자의 식성처럼 유희적 탐욕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찾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꿈을 꾼다. 어떤 이는 팝콘을 씹어대며 낄낄거리고¸ 어떤 이는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 보냅니다. 어떤 이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결벽하게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합니다. 각자의 취향대로¸ 혹은 관람의 목적대로¸ 그들은 상영관을 찾음으로써 영화를 존재하게 만듭니다. 거장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경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사랑하듯 자신들의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에게 진심 어린 헌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상영관』은 바로 관객이라는 지지자를 위한 영화의 애정 어린 편지와도 같으며 관객화된 영화의 객석관람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작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은 왜 굳이 큰 걸 하려는 걸까요. 영화가 인용하는 짐 해리슨『Jim Harrison』의 말은 32편의 짧은 영화들의 태도를 함축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때로 영화를 통해 꿈을 꾼다. 그건 우리가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만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현실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기에¸ 그 현실을 완전하게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영화가 존재하는 건 우리가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는 한¸ 극장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언제나처럼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확인하고 되새길 것입니다. 그건 평범한 거장이나¸ 위대한 관객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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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시즌2

영화이야기|2016. 3. 14. 09:47



결론부터 말해보자. 『색즉시공 시즌2』는 전편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일반적인 속편의 운명을 온몸으로 떠안습니다. 『스크림2』의 공포영화광 랜디의 말을 섹시코미디 버전으로 살짝 비틀어 보면 원본보다 노출은 더 많고¸ 더 자극적이며¸ 살이 더 난무하고¸ 내러티브는 더 꼬인다라고 바꿀 수 있겠습니다. 예산과 볼거리로 승부하는 상업 영화 속편의 법칙은 여전히 공고하지만 속편은 전편보다 항상 별 볼일 없다는 결과물이 상당수 아니었던가.



『색즉시공 시즌2』는 전편의 감독 윤제균의 빈자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증명합니다. 『두사부일체』와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으로 흥행성을 인정받았던 윤제균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이름을 올렸으니 일단 안심은 하시라. 몸 개그를 위한 차력동아리는 볼거리를 위해 K-1 동아리로 배를 갈아탔고¸ 볼륨감 넘치는 여배우들의 몸매는 전편의 에어로빅 동아리에서 수영부란 설정으로 바톤 터치 했습니다. 하지원의 섹시미가 아쉽다는 팬들도 있겠지만 엽기적인 그녀로 변신한 송지효의 매력도 쏠쏠합니다. 올 해만 4편을 개봉시켜서 그렇지 임창정의 순정남 연기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출? 진재영의 두 번의 정사신을 제외하고 가슴의 직접적인 노출을 피했던 전편과 달리 『섹즉시공 시즌2』는 속편답게 화끈하기 그지없습니다. 수차례의 노출을 불사하는 이화선이 안쓰럽게 보일정도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수영부로 출연하는 두 조연 여배우도 가슴쯤이야¸ 라는 바람직한『?』 자세로 노출을 불사하니 걱정 마시길. 하지만 『색즉시공』의 성공전략은 노출 자체가 아니라 그간 한국 영화에 없었던 성에 대한 솔직한 대사와 야릇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에피소드의 감칠맛이었다는 점을 복기해 보라. 


그러니까 관건은 노출 수위와 횟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편의 뼈대를 고스란히 가져온다는 점에서 기본은 하지만 전편의 답습하는 수위가 아슬아슬합니다. 은식『임창정』의 이별과 경아『송지효』와의 첫 만남을 개괄하는 오프닝 이후 수영장 신¸ 나이트에 이은 모텔 시퀀스¸ 생일파티¸ 바닷가에서의 엠티¸ 수영대회와 삼각연애의 갈등¸ K-1 대회로 이어지는 마무리 등 에피소드별 전개는 전편과 판박입니다. 팬션에 잠입한 2인조 도둑의 등장도 그대로며¸ 송지효와 신이는 술 취해 외계어를 지껄이던 전편의 임창정¸ 최성국 짝패의 포장마차신을 패러디하는 수준입니다. 익숙함으로 승부하는 전략은 관객들에게 물론 편안함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여자친구를 위해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는 순정남의 순애보도 그대로고¸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삼각관계도 대중 영화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색즉시공 시즌2』의 아쉬움은 새로운 출연진의 캐릭터와 설정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진재영과 하지원의 경쟁구도를 큰 틀로 삼았던 전편에 비해 새로 등장한 이화선이 맡은 수영부 코치 캐릭터는 노출을 위해 쓰이는 도구¸ 딱 거기까지 입니다. 경아 캐릭터 또한 전편에 비하면 그 밀도가 한참이나 떨어집니다. 과거를 이해해 준 은식과 옆집 오빠였던 젠틀남 검사와 고민하는 삼각 로맨스 주인공에 더도 덜도 아닙니다. 



K-1 동아리나 수영부 설정도 효율성 면에서 낙제점입니다. K-1은 데니스 강을 모셔와 록키를 패러디하는 후반부 볼거리를 위해 기능하며 수영대회 장면도 기계적인 컷의 연속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불어 18세 이상 관람가 『엽기적인 그녀』 버전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경아와의 로맨스도 철지난 성폭력 클리쉐로 인해 식상함을 안겨줍니다. 그러니까 전편이 중반까지 웃기고 후반부 울리는 한국영화 공식에 충실한 가운데 낙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노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2편에서 경아가 혼전순결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은식이 경아와의 첫 날밤에 목매다는 둘의 관계가 코미디이었을 때는 유효하지만 그들의 과거가 짧은 회상신으로 갈무리되면서 그야말로 퇴행적이고 무성의한 상업 영화로 전락합니다. 


1편의 후반부. 낙태 수술을 받은 은효『하지원』를 위해 차력으로 웃음을 짓게 하던 은식을 슬로우 모션으로 절묘하게 잡아냈던 그 장면을 기억하는가요? 『색즉시공 시즌2』는 노출과 화장실 개그는 더 하드해졌을지 모르지만 관객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영화적 재미는 현저히 줄었습니다. 기본은 하지 않느냐고? 섹스 코미디에 많은 걸 바라는 것 아니냐고? 그럼¸ 뭐 420만 관객 동원에 빗나는 전편의 흥행도 딱 기본만큼만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랜디가 빼 멋은 것 한 가지는 흥행 또한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의 흥행 성공도 그다지 없다는 점입니다. 왜? 제작비와 마케팅비는 계속 널뛰는 상승하고 있으니까요? 요건 슈렉이건 스파이더맨이건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랍니다. 속편의 길은 안전하지만 또 그 만큼 험난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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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트 러쉬

영화이야기|2016. 3. 10. 11:25



드넓은 갈대밭으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갈대의 나부낌과 바람의 흔들림 속에 한 소년이 서있습니다. 무언가 황홀한 눈빛으로 자연을 음미하는 듯한 소년의 물음은 의아합니다. 들리나요? 하지만 바람 위로 스러졌다 일어남을 반복하는 갈대의 흔들림만이 눈으로 확인될 뿐입니다. 하지만 대기 속에서도¸ 바람 속에서도 무언가를 들을 수 있다는 소년은 그것이 음악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갈대의 흔들림 속에서 바람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이는 곧 대기와 사물의 섬세한 마찰이 빚어내는 화음이 되고 리듬이 됩니다. 음계가 형성되고 음표가 그려집니다. 그 순간¸ 사물은 음표가 되고 세상은 악보로 연주됩니다.



『어거스트 러쉬』는 그 평범한 세상에 가득 채워진 음표를 만나는 작업입니다. 세상은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대사는 영화 밖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아는 진실이지만 그것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어거스트 러쉬』가 묘사하는 천재성은 그 차이로부터 발생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이성적 인지를 넘어서 가슴으로 느끼고 감성으로 체득하는 천재적 감수성. 범인『凡人』의 청력에 소음으로 통용되는 일상의 소리는 소년에게 리듬으로 체화『體化』되고 멜로디로 공명합니다. 세상에 널린 무질서한 소리의 체계가 소년에게 음악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의 감동은 『어거스트 러쉬』의 이야기적 여백이 지닌 순수한 감동으로 전이됩니다. 


에반『프레디 하이모어』의 천재성은 혈통적인 기반과 소년의 신념을 통해 설명됩니다. 락 밴드 출신의 아버지 루이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전도유망한 첼리스트 라일라 노바첵『케리 러셀』과 하룻밤을 보내고 이는 결국 에반의 태생적 원인이 됩니다. 두 남녀의 만남은 결국 서로 다른 장르에 기반한 두 음악이 크로스오버적 선율로 빚어지는 것처럼 천재를 잉태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동화를 믿듯 난 음악을 믿는다는 소년의 신념은 재능을 담아내기 위해 준비된 그릇처럼 보입니다. 


소년의 음악적 통찰은 교양의 습득을 통한 빠른 성장이라기 보단 체내에 잠재된 재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장의 서사를 결핍시키는 방식이기에 설득력을 반감시키는 감상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이는 이성적인 사고로 이해될 수 없는¸ 혹은 평범한 서사의 구조를 중시하는 범인의 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천재적 특수성인 까닭입니다. 소리를 음계로 승화시키는 소년의 천재성은 단순히 절대음감의 본능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습니다. 리듬과 멜로디의 본능을 인정한다 해도 음계를 파악하는 객관적 숙련을 일시에 뛰어넘는 과정은 논리적 맥락을 요구하는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성적인 구조에 따른 해석이냐¸ 감성적인 흐름에 따른 감상이냐에 따라 『어거스트 러쉬』의 악보는 상반되게 읽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 영화로서 『어거스트 러쉬』는 일정한 포만감을 부여할만합니다. 세상에 산재한 소리를 악보로 정렬하는 소년의 선천적 재능은 일상적 사운드를 캐치하는 카메라의 동선을 통해 시각적 리듬을 구현하기도 합니다. 이는 음악적 청취감을 시각적으로 상승시키는 묘미를 얹혀줍니다. 또한 음악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 해도 감상의 묘미를 살릴 수 있습니다. 특히나 조나단 라스 메이어스의 수준급 락보컬이 인상적이며¸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스트리트 뮤직의 낭만도 경쾌합니다. 또한 관현악단의 섬세한 연주를 살린 클래식 연주의 감미로운 엔딩은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어거스트 러쉬』은 음악적 인생을 신뢰하는 인물들이며 그들의 여정 또한 음악을 기반으로 할 때 빛납니다. 그들에게 음악이 결핍될 때 인생의 상실감 또한 커집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적 향유를 삶의 기반으로 삼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투영하며 그런 개인의 예술적 열정이 형성하는 세계적 감동의 완성을 그려내고자 하는 여정의 필연입니다. 개인의 천재적 재능이 사회를 감동시키는 과정은 아름답다. 그건 천재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천재성을 발휘하도록 용인하는 사회적 포용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How do this music come to you?』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소년의 신념¸ 즉 그 순수한 예술적 믿음이 다수의 마음을 흔드는 순간으로 대답되는 것입니다. 다소 작위적인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엔딩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는 건 그 순수한 감동의 전이야말로 『어거스트 러쉬』의 순진한 표정일 것이라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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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세계

영화이야기|2016. 3. 4. 11:01



햇볕 잘 드는 집에서 가족과 우아하게 살고 싶은 들개파 중간 보스 인구『송강호』는 협박과 구타로 피투성이가 돼 도망가는 건설회사 사장의 뒷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아름다워 라며 자신의 비루한 일상을 희화합니다. 고급 외제차에 멋진 수트를 입고 조직 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부양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이라도 잘살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이시대 가장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캐나다 유학 보낸 아들의 학비를 걱정하고¸ 사춘기 딸의 반항에 좌절하는 인구의 삶은 자신이 벌어다 준 돈을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써본 적 없다는 아내의 푸념으로 인해 더욱 고달프다.



생활 느와르를 표방한 『우아한 세계』는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노회장『최일화』에게 충성을 다하고 고향친구이자 라이벌 조직의 간부인 현수『오달수』와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의리 있는 남자의 표본까지 아우르겠습니다. 직업만 조폭일 뿐인 평범한 가장의 삶을 통해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가정도 챙겨야 하는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연애의 목적』에서 남녀의 연애심리를 능청스럽게 그려낸 한재림 감독은 조폭이란 무거운 소재를 아버지란 친근함으로 접근¸ 『우아한 세계』를 누구보다 인간적인 영화로 완성시켰습니다. 평범한 직장인들의 삶과 조폭의 일상이 각자가 속한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덤덤히 전달하고 어느 가정마다 있을법한 갈등 요소를 자연스럽게 섞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 동조를 이끌어냅니다. 


영화 속 인구는 딸에게 냉대받고 조직에서도 견제 받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단지 묵묵히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또 그게 자신이 바라는 삶이라 믿으며 살아갑니다. 『우아한 세계』는 단순히 좋은 아버지와 나쁜 조폭의 경계를 구분 짓기보다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견제하고 타협하는 가장의 삶을 보여줍니다. 특히 핸드 헬드 기법으로 보여지는 몇몇 장면들은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르는 그의 불안함을 대변함과 동시에 장르적 특징을 표현하기에 충분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괴물』을 통해 애끓는 부성을 연기한 송강호의 연기는 어느 한 사람 튀거나 모자라지 않는 조연들의 호연과 맞물려 영화의 완성미를 더합니다. 대사가 아닌 표정으로 말하는 인구의 속내는 송강호로 인해 더욱 생생히 전달됩니다. 아버지는 강합니다. 그러나 외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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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쉬

영화이야기|2016. 3. 3. 13:17



어린아이 보다 어른이 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로 유명한 아드만-드림웍스가 만든 『플러쉬』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쥐를 소재로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란 심오한 물음까지 유쾌하게 풀어낸 3D애니메이션입니다. 1억 3천만 불에 이르는 제작비가 말해주듯 휴 잭맨¸ 케이트 윈슬렛¸ 장 르노에 이르는 화려한 보이스 캐스팅은 그 화려한 위용을 증명합니다. 사랑과의 공생 관계에 익숙한 쥐들이 축구에 열광하고 간식을 즐기며 이보다 더 인간다울 수는 없는 인간적 삶을 즐기는 모습은 아드만 스튜디오의 전작들이 보여준 클레이 점토 특유의 투박하지만 따듯한 느낌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 부족 한 것 없는 부유한 삶을 즐기는 애완용 쥐 로디『휴 잭맨』는 궁전 같은 숙소에 시간 마다 짜인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는 럭셔리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살아있는 친구는 인간인 주인뿐입니다. 착실하고 귀여운 애완용으로 길러지던 그가 하수구의 역류로 집안에 들어오게 된 망나니 쥐 시드 때문에 변기 밑 지하 세계 래트로폴리스로 흘러가게 되면서 만나는 시궁창 쥐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소란스럽기 그지 없고 우매하며¸ 거칠기 그지 없는 삶의 연속입니다. 자신의 집인 렉싱턴의 저택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지하 세계를 주름 잡고 있는 개구리 파 보스의 타켓이 된 여장부 리타의 도움이 필수인데¸ 모험심 강한 그녀가 온실의 화초처럼 곱게 살아 온 로디를 변화시키는 모습은 여태껏 스테레오 타입으로 존재하던 남녀의 역할 자체를 유쾌하게 뒤집습니다. 


특히¸ 변기 속에 빨려 들어간 주인공 로디가 래트로 폴리스에 도착하기 전 하수구 안을 어지럽게 떠 다니는 틀니와 버려진 금붕어¸ 쓰다 버린 칫솔과 각종 소품들이 만나는 장면은 자잘하지만 한때 유용했던 물건들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지를 가볍게 비꼬기 까지 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유일한 악당인 토드 『이완 캑컬린』가 사실은 영국 왕자 최고의 애완용 두꺼비였다가 새로 들어온 쥐 때문에 버림받고 결국은 하수구 쥐들을 한방에 물『?』먹이려는 야심을 꿈꾸게 됐다는 점¸ 그의 꼴통 부하인 화이티『빌 나이』가 사실은 실험용 쥐인데 그 부작용으로 온 몸이 하얗게 됐다는 내용은 『플러쉬』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부끄러움까지 갖게 만듭니다. 



토드의 사촌이자 해결사로 나오는 개굴레옹『 장 르노』이 프랑스 출신이라 피를 나눈『?』 사이라도 태생적 앙금을 가진 채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이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영화적 스토리가 느슨해질 즈음 흘러나오는 흥겨운 팝송이 결국엔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풍요로움만이 진정한 행복 이라는 세상의 익숙한 진리를 즐겁게 마무리 시킵니다.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안락한 지상의 세계를 버리고 지하로 들어간 로디와 그의 자리를 꿰찬 시드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하는 지를 발견한 관객이라면 『플러쉬』가 지닌 또 다른 심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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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영화이야기|2016. 3. 2. 09:57



아메리칸 스윗하트로 불리는 줄리아 로버츠가 백혈병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서정적인 영화 『사랑을 위하여』에서 부잣집 도련님인 남자주인공이 황금빛 그림들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반나체의 여자가 그려져 있는 회화 몇 점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그 짧은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테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 영화 속에 그림을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입니다.



그렇다고 전기 영화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추리해야 하고¸ 거울과 수면에 비친 인물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화면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클림트의 주변인들 뿐입니다. 라울 루이즈 감독은 영화의 내용도 그게 클림트의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모른 채 시공간을 넘어가는 연출방식을 택해 자신의 망명경험을 쏟아내듯 죽음에의 담담한 공포와 울렁이는 심리를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생전에 작업할 때마다 그림의 모델이 될 창녀들을 방안 가득 채우고¸ 평생 매독에 시달렸던 클림트는 방탕한 화가로 불리기보단 시대를 앞서간 천재 화가로 평가됐습니다. 영화는 외설적인 그림일수록 예술이 된다는 파리에서 만난 레아『새프론 버로즈』와의 사랑을 통해 영혼을 치유 받으려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인조차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는 모호한 현실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거울 뒤 사람들은 후세에 작품을 통해 클림트를 느끼려는 대중들의 심리를 나타내듯 때론 우매하고 고결하게 클림트를 응시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조차 이게 영화인지 그림 속의 세계인지 모호해질 무렵 우리는 현미경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클림트의 눈을 통해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 어떤 색깔보다 유혹적인 황금빛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클림트는 광기 어린 연기력을 가진 존 말코비치에 의해 완벽하게 환생했고¸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 막 걸어 나온듯한 여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입니다. 특히¸ 클림트의 추종자이자 독보적인 화가였던 에곤 쉴레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쁨은 영화를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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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터비아 다시보기

영화이야기|2016. 3. 1. 10:08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1954년 작¸ 『이창』이 아메리카노라면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크림을 듬뿍 얹고 우유를 섞어 넣은 라떼 정도일까요.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이창』의 중후한 긴장감에 디지털 영상 기술의 산물을 얹고¸ 발랄한 하이틴의 감성을 섞어 좀 더 부드럽고 매끈한 맛을 냅니다. 


우발적인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으로 문제아가 된 케일은 수업 중¸ 자신을 지적한 교사가 아버지를 언급하자 우발적으로 주먹을 날립니다. 결국 3개월 간의 가택연금에 처해진 케일은 비디오 게임과 TV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혈기왕성한 10대의 에너지를 소비하기에 3개월은 너무 길게만 보입니다. 그러던 중¸ 옆집에 이사온 애슐리『사라 로머』는 소년의 욕구불만을 호기심 어린 염탐으로 돌리게 하며¸ 이는 결국 케일과 애슐리의 인연을 접속시키는 계기가 되지만 알아서는 안 될 정보마저 습득하게 합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이웃에 무시무시한 살인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창』과 『디스터비아 다시보기』의 차이는 시대에서 비롯됩니다.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이창』보다 반세기 동안 발전된 영상 기술을 대거 활용합니다. 망원렌즈에 의지하던 제프리와 달리 케일『샤이아 라보프』은 고성능 망원경을 비롯해 디지털 캠코더와 휴대폰 카메라까지 동원합니다. 아이튠즈『itunes』로 음악을 듣고 Xbox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젊은 포터블 세대로부터 펼쳐지는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가볍고 충동적인 장난을 즐기지만 무모할 정도로 도전적인 세대의 기질을 영화의 감수성에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소년의 무료함에서 비롯된 관음이 의심스런 목격담으로 번져나가고 결국 진지한 행동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굴려나갑니다. 철부지 10대들의 발랄한 일상을 보여주던 전반부의 가벼움은 극악한 긴장감에 둘러싸인 채 무겁게 내려앉는 후반부와 극단적으로 대비됩니다.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가볍지만 날렵한 10대의 감성을 영화적 화법으로 동원합니다. 소년의 놀이에 불과했던 엿보기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웃에 대한 혐의로 번지며 세밀한 수사망을 동원하게 됩니다. 물론 잠복 근무엔 도넛과 커피가 필수라는 애슐리의 말처럼 그 순간까지도 장난스러움을 버리지 못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결국 위험한 이웃을 자극하는 수순을 밟고 『디스터비아 다시보기』의 본격적인 서스펜스로 돌입하는 계기를 다집니다. 마치 위선으로 가린 악의 정체처럼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가벼운 농담과 장난끼로 관객을 안심시키다가 돌발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긴장감으로 순식간에 돌진합니다. 동시에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관심이 단절된 이웃의 정체를 들춘다는 점에서 이웃 커뮤니티에 대한 소통의 필요성을 은연중에 어필하는 시선이란 점도 흥미롭다.



사실 전반적인 이야기의 구조는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지만¸ 순발력있는 전개로 인해 그 타이밍을 쉽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시종일관 긴장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스릴러적 정공법에 비해 가볍지만¸ 징후의 긴장감에 무겁게 짓눌리기보단 리드미컬한 전개와 재기 발랄한 캐릭터들로 인해 한층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유쾌함에 게릴라적인 긴장감을 겸비합니다. 또한 『디스터비아 다시보기』는 얼마 전¸ 『트랜스포머』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샤이아 라보프를 비롯해 영화를 가득 채운 할리우드 유망주들만큼 신선함이 가득합니다. 물론 그것이 히치콕의 뛰어난 업적에 비해 한 수 아래라 할지라도¸ 시대적 트렌드를 반영한 영리함에 탄력적인 스릴을 가미한 『디스터비아 다시보기』의 잘 빠진 매력은 영화적 즐거움을 모자람 없이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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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즌 독

영화이야기|2016. 3. 1. 09:19



그런 영화가 있었습니다. 멀티플렉스의 반을 넘게 점유하고 있는 우리 영화와 나머지를 차지 하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에 식상해 조금 더 새로운 것이 보고 싶을 때¸ 영화제 등을 기웃거렸지만 지나친 새로움을 감당하기엔 수면 부족일 때¸ 떨어지는 헬멧들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산 같은 독특한 컷에 왠지 끌린 영화.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태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진 영화. 


CF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때문에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에서 두 번째 작품인 『시티즌 독』까지 걸린 시간이 4년¸ 다음 영화는 또 4년은 흘러야 완성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이 만든 『시티즌 독』은 지난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2회 CJ아시아인디영화제에서 이미 소개된바 있으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입소문의 위력을 가진 영화 입니다. 


도시인에 대한 은유적 제목이 주는 정치성이 조금 거리감 있게 느껴질 만큼 『시티즌 독』은¸ 현실성을 망각한 색감을 무기로 시작부터 그림책 같은 농촌 풍경¸ 방콕으로 가면 꼬리가 난다는 할머니 말씀¸ 그리고 흐르는 사랑 노래로 한편의 우화 같은 이야기를 펼쳐 놓습니다.



분명 현재이고 이름도 낯설지 않은 공간¸ 동시대의 방콕을 주무대로 하고 있건만 『시티즌 독』이 보여주는 것은 태국어 대사만큼이나 생경한 공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 그리고 그곳에 막 도착한 꿈이 없는¸ 그래서 꼬리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청년 팟. 그가 첫 직장인 통조림 공장의 채플린적이고 무성 영화 같은 그 장면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순간¸ 다시 한번 제목에서 느꼈던 무게감을 감지¸ 낮게 한숨을 쉬려던 찰나¸ 팟은 통조림에 들어간 손가락을 찾아 가게를 누비고 톡톡 두드리는 버릇을 잘려서도 버리지 못했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의 손에 붙는 순간¸ 『시티즌 독』의 독특한 판타지의 공간이 열립니다.. 


사람에게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티즌 독』은 하얀 책을 내용을 알게 되면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진과 그녀를 사랑하게 된 팟의 사랑이야기지만 팟과 잘린 손가락이 바뀐 인연으로 친구가 된 요드¸ 나이를 알 수 없는 맴과 그녀의 골초 곰인형 통차이¸ 도마뱀으로 환생한 할머니 등 동시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판타지를 펼치는 시끌벅적한 도시의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소시민들이 펼치는 숨겨진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은 공간인 도시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유지되는 이 상식적이지 않은 전개는 다행히도 주인공 팟이 갖고 있는 순수함과 우직함으로 이야기의 사실성과의 균형을 조성합니다. 비록 담배를 안 사왔다고 통차이가 불평은 할지라도 말입니다.



경비원 팟과 청소부 진이 꾸는 꿈은 화려하고 멋진 것은 아닙니다. 진의 하얀 책의 실체도¸ 죽어서도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오토바이 운전사도¸ 재미있는 동화는 소시민에 대한 은유를 품고 있지만 『시티즌 독』을 보고 있다 보면 풍자 보다는 애정을 발견하고 싶어집니다. 어쩌겠는가. 파란 옷을 입은 진에게 반한 팟의 눈에는 강아지들까지 그 파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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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운명

영화이야기|2016. 2. 29. 08:28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은 예리한 칼이 되어 일상적인 통념을 무너뜨립니다. 박진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는 분명 그런 분류의 영화였습니다. 욕정이 없는 사람을 다른 말로¸ 노인이라고 맘대로 생각했던 우리의 편견을 그는 이 한편의 영화로 통렬하게 비웃으며 깨버렸습니다.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그려낸 『죽어도 좋아』을 보고¸ 우리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사회성 강한 작품을 그가 앞으로도 만들 것이라 『여전히 맘대로』 예상했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매춘부를 사랑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입니다. 에이즈라는 말만 빼면 참 뻔한 이야기 입니다. 요즘은 이런 얘기 영화에서보다 TV드라마에서 더 자주 등장해 여자의 신분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만 알면 내용도 안 보고¸ 주인공들의 대사를 읊을 수 있을 정도 입니다. 통속적인 사랑이야기의 달인인 관객들을 상대로 제 아무리 전도연¸ 황정민이 출연한다 할지언정 구구절절한 신파의 그 뻔함¸ 어디 가겠어!? 그런데 어디 안가더라. 가기는커녕 사람을 울리다 웃게 만들어 거시기에 털 날 지경으로 몰아붙입니다.



예쁜 얼굴로 이런 촌구석에서 다방레지일 할 사람으로 안 보이는 전은하『전도연』와 혼자 늙어가는 급한 마음에 베트남까지 신부 찾으러 갔던 농촌 총각 김석중『황정민』의 사랑을 그린¸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은 예상과는 달리¸ 통속적이면서도 진부함은 제거된 신파 멜로영화 입니다. 감독의 전작을 봐서는 드라마틱한 멜로영화를 상상하기보다 현실성이 가미된 홍상수식 사랑이야기 혹은¸ 다큐멘터리 기법이 가미된 리얼감동 드라마를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우리의 예측을 벗어났든 간에 석중과 은하의 사랑은 사랑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맺은 인연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진심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기 가식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건¸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여성의 매춘행위를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은¸ 영화제작 배경이 심심치 않게 작용했을 게다. 순수한 사랑이라고 관객 스스로 주입하듯 애쓰면서 볼 필요도 없이¸ 은하가 한 남자에게 받는 사랑은 과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녀가 아무리 예쁘고 싹싹하고 기구한 팔자의 여성이라지만 다방레지에서 매춘부로 전락하는¸ 거기다가 전 남편과의 지저분한 관계로 인해 여관방에서 헐떡이는 모습들은 그리 애달프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렇듯 한 여성에 대한 차가운 시선 위에 감독은 이중적으로도 남성의 따듯한 시선을 그 위에 덮어 버립니다. 속죄 받을 길 없는 여자의 천함이 남성의 순수한 사랑으로 역시나! 구원받습니다. 페미니스트는 아니더라도 여자의 신분과 상황 그리고 남성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비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설정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차적인 입장을 배제하더라도 상투적인 이야기에 진심을 얹혀 사랑의 진정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너는 내 운명』은 놀라운 작품입니다. 


통속이 과해 신파로 전락하는 위험한 지점에서 감독은 여성의 심리를 대변하지 않고 남자의 강함¸ 즉 남성성을 부각해 이 사랑에 운명을 건 석중을 입체적으로 영화 속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일편단심이 존재할거라 누구나 생각하지만 그게 매체의 힘을 빌려 걸러지게 되면 그 현실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박진표 감독은 영화 초반에 결정적인 순간¸ 예를 들면 고백씬 같은 감정의 폭발이 보이는 장면마다¸ 카메라를 인물에게서 멀리 놓고 바라본다.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으로 찍은 몇몇 장면은 내용의 진실성을 살려줍니다. 이로 인해 은하에게 향한 석중의 감정이 극 안에서 현실감 있게 살아나자 중반 이후부터는 카메라가 인물에 밀착해도 신파의 억지성에 이야기가 말려들어가지 않는 효과를 거둔다. 


어떻게든 일상의 디테일 안에 사랑을 구겨 넣으려던 쿨 한척 하는 멜로영화보다 세련되기는커녕 투박하기만 한 『너는 내 운명』이 마치 새로운 형식의 영화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아무도 담아내지 못한 진심을 담아냈기 때문이리라. 가장 상업적인 장르인 멜로를¸ 그것도 신파로 몰고 가면서까지 얻어낸 관객의 눈물은 확실히 진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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